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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의 기억’ 되살리는 준엄한 저항의 기록…‘아임 스틸 히어’

1970년대 군사 독재 정권이 민주주의 세력을 탄압합니다. 저항하는 이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끌고 가 감금하고 고문합니다. 가족들은 행방도 생사 여부도 알지 못합니다. 한국이 아닌 브라질 현대사 얘기입니다.

지난 20일 개봉한 ‘아임 스틸 히어’는 70년대 브라질 군부독재 정권에서 자행한 정치 탄압을 소재로 하는 영화입니다. 지난해 제9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에밀리아 페레즈’를 제치고 국제장편영화상을 깜짝 수상해 화제가 된 이 작품을 극장에서 관람했습니다.

영화 ‘아임 스틸 히어’ 포스터. 안다미로 제공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노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해변. 평화롭고 생기 넘치는 지상 낙원과 같은 모습이지만, 이내 군용 트럭 행렬이 해변 도로를 지나며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여전히 해맑습니다. 다섯 아이를 양육하는 루벤스(셀튼 멜로)와 유니스(페르난다 토레스) 부부도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근사하고 넓은 바닷가 저택에 사는 이들 가족은 그야말로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즐깁니다.

하지만 군부독재 정권이 행복에 서서히 균열을 냅니다. 군인들은 불시에 시민들을 검문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뉴스에선 불안한 소식들이 흘러나옵니다. 공화당 국회의원 출신인 아빠 루벤스는 상황이 심각해질 것을 예감합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합니다. 어느 날 집에 사복 경찰들이 들이닥치더니 루벤스를 끌고 갑니다. 한순간 가장을 잃은 가정에는 긴장감이 감돕니다. 그러나 이것이 본격적인 비극의 시작일 줄은 몰랐습니다.

영화 ‘아임 스틸 히어’ 속 한 장면. 안다미로 제공

월터 살레스 감독의 영화 ‘아임 스틸 히어’는 군부독재 정권에 남편이 사라지자 진실을 찾아 싸운 여성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유니스 파이바의 아들인 마르셀로 파이바가 지은 회고록을 바탕으로 제작했습니다.

보통 민주화운동 영화의 주인공은 민주 투사입니다. 주인공이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장면으로 의분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거리로 나가 용감히 항거하는 모습으로 감동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임 스틸 히어’는 그런 영화들과 결이 다릅니다. 독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 투쟁한 일선 부대가 아니라, 그의 가족들의 삶을 조명합니다. 그래서 고문을 당하거나 시위에 나서거나 무장 투쟁하는 장면은 볼 수 없습니다. 유니스는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조사를 받기는 했지만, 끔직한 폭행이나 고문은 당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뚜렷한 악역도 없습니다. 독재자의 모습은 단 한번도 묘사되지 않고, ‘빌런’ 역이라 할 만한 악당 캐릭터가 없어 주인공과의 갈등도 빚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브라질판 1987’과 같은 영화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호흡이 길고 전개가 느린 편이라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극적인 효과를 덜어내는 대신, 담담하게 울림을 줍니다. 루벤스의 아내 유니스의 담대한 태도에 집중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영화 ‘아임 스틸 히어’ 속 한 장면. 안다미로 제공

유니스는 월터 살레스 감독의 표현처럼 절제되고 고요한 저항을 보여줍니다. 유니스는 딸과 함께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나 집에 돌아오지만, 루벤스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합니다. 전직 의원인 루벤스의 실종에 언론도 주목하지만, 군부는 그를 체포했던 사실조차 부인합니다. 가장이 행방불명되자 남은 가족은 날마다 애가 탑니다.

이전과 같은 일상생활은 이제 사치입니다. 전화는 도청당하고, 집 주변에는 사복 경찰들이 잠복해 24시간 감시 중입니다. 이전에 세웠던 계획들도 더는 의미 없습니다. 멋진 집을 새로 지으려던 꿈도 날아갔고, 아이들의 장래도 불투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유니스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피해자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늘 당당한 자세로 맞섭니다. 아이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중심을 잡고, 남편의 행방을 찾는 걸 포기하지 않습니다.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려는 사진 기자가 웃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자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영화 ‘아임 스틸 히어’ 속 한 장면. 안다미로 제공

유니스 역을 맡은 페르난다 토레스의 열연은 감동을 더합니다. 유니스는 강인했던 여성이지만, 한편으로는 강인해야만 했던 여성이었습니다. 눈빛과 표정이 살아있는 토레스의 탄탄한 연기는 홀로 고군분투한 유니스의 인생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달했습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브라질 현대사는 놀랍도록 한국과 닮았습니다. 군부독재 정권의 불법감금과 고문, 살인, 언론장악 등 만행은 유신체제 하의 한국과 다를 게 없어 공감을 유발합니다. 독재 정권의 만행이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는 메시지를 주는 결말은 불과 8개월여 전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비상 계엄 사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영화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계엄령의 기억’으로 상영됐는데, 이 제목 그대로 개봉했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살레스 감독은 어린 시절 파이바 가족과 가까운 곳에 살았다고 합니다. 바닷가 주택을 경찰이 급습한 이후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집의 모습을 목격한 것은 그에게 충격으로 남았습니다.

살레스 감독은 이러한 과거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데도 집중했습니다. 파이바 가족이 살던 집과 가장 흡사한 집을 찾아 꾸몄고, 작은 소품 하나하나까지 신경 썼습니다. 실존 인물과 유사한 느낌의 아역 배우를 캐스팅하는 1년이 걸렸습니다.

섬세한 연출과 명연기는 국제 무대에서 인정 받았습니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과 제8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여우주연상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각본상을 차지했습니다. ‘아임 스틸 히어’가 브라질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을 받는 등 주목을 받자 브라질 정부는 유니스 파이바에게 사후 훈장을 수여하고,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하는 등 늦게 나마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했습니다.

제 점수는요~: 80/100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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