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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요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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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병원, 한국인 세운 부산 최초 종합병원

2025.05.02

 

 

 

 

옛 백제병원 건물의 역정과 풍상은 복잡다단한 부산 근대사의 상징이다. 한국인이 세운 부산 최초의 병원에서 중국 요정집, 일본군 숙소, 예식장 등으로 탈바꿈했으며 지금은 온갖 잡다한 상점 등의 집합소다. 사진=정대현기자 jhyun@

 

■ 백제병원(百濟病院)

부산역 맞은편 부산 동구 초량동 화교거리에 있는 4층의 붉은 벽돌집. 분식집, 수퍼, 부동산, 절 등 각종 간판들이 건물의 외관을 어지럽게 장식하고 있다. 이 건물이 1930년에 지어졌다. 건물 외관을 들여다보니 창문의 위치가 제각각이고 그 모양도 다양하다. 독특하다.

 

동행한 김기수 동아대 건축학부 교수가 이 건물을 설명했다. 

"마름모꼴인 대지 모양에 맞춰 지었기 때문에 건물 조형이 매우 자유롭습니다. 건축 설계상으로 신경을 쓴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요. 창문 모양이나 삼각형, 사각형 등 다양한 형태의 방 모양도 이를 잘 나타내죠. 1930년대 지어진 건물들이 대부분 1~2층 목조건물이란 점에서 당시 벽돌건물을 4층까지 올렸다는 것은 상당히 획기적인 발상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살았던 동광동 광복동에도 4층짜리 고층 건물이 없었습니다." 

 

부산 근대의 기념비적 건물이라는 것. 70년 전 이 건물은 얼마나 전위적이고 센세이셔널 했단 말인가! 당시 서양식으로 지어진 멋드러진 이 백제병원을 보기 위해 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니.

 

김 교수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20여 년째 이 건물의 관리인을 맡고 있다는 정태식 씨는 이 건물이 상가로 사용될 때 왔다고 한다. 20여 개의 방이 있는데 사무실, 가게, 절, 화실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된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 건물이 병원, 중국집, 예식장 등으로 사용됐다는 말은 들었다. 이곳이 예식장으로 사용됐을 때 결혼했다는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했다.

 

한국인이 세운 부산 최초의 종합병원이었던 백제병원은 굴곡진 부산 근대사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건물이다. 1930년 명지(현 강서구) 출신의 최용해가 근대식 병원으로 건립한 백제병원은 당시 부산부립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부산의 3대 병원이었다. 그러나 인체해골 표본 사건으로 최용해가 소환 조사를 받는 등 병원 운영에 위기가 닥치자 그는 병원을 중국인에게 팔아넘겼다.

 

백제병원은 졸지에 한량과 기생들이 넘쳐나는 중국집 봉래각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러나 세계 2차대전이 치열하던 1942년 중국집 주인이 중국으로 귀국한 뒤 이곳은 다시 일본군 장교 숙소로 탈바꿈했다. 백제병원 건물의 변천사는 계속되는데 광복 후에 일본인이 쫓겨난 자리에 치안대 사무소가 들어서고, 그 이후에는 신세계 예식장으로 사용되다가 1972년 화재로 건물 내부를 모두 태우고 말았다.

 

그 뒤 현재와 같은 상가시설이 되어 있는데 분식집, 수퍼, 부동산, 절 등 온갖 잡다한 것들이 뒤섞여 들어가 있는 현재 모습이 얼룩진 부산 근대사를 여실히 드러내는 상징 같다. 백제병원에는 끊임없이 외세의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한반도 역사의 자취가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4층에 있는 화실을 방문하고 나올 무렵 김기수 교수가 매우 의미있는 화두를 던졌다. 

"역사성과 특이한 구조를 지닌 이 건물을 아틀리에를 갖춘 문화공간으로 꾸민다면 의미있게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문화재청은 백제병원을 등록문화재로 추진 중이며 올 초 1차 조사를 마쳤다.

 

■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부산시지정기념물 제49호, 중구 대청동)


고난과 투쟁으로 점철된 20세기 한국사의 축소판이다. 이 건물은 1929년 동척 부산지점으로 신축됐다. 동척 부산지점은 일제의 위세를 등에 업은 국책회사로 조선 민중을 착취한 식민지 수탈 기구였다. 해방 후 이 건물은 미군 주둔지로, 한국전쟁(1950~1953) 때에는 미국대사관으로 사용됐다. 이후 미문화원으로 1980년대 불평등한 한미 관계의 상징으로 인식돼 반미 운동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50년간 미국이 무상으로 사용했던 이 건물은 1999년 4월 30일 정부에 반환됐고 2003년 7월 3일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근현대사의 고난과 시련, 이를 딛고 일어서려는 한국인의 투쟁과 노력이 이 건물에 응축돼 있다.

 

■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등록문화재 제41호, 서구 부민동)

 

근대 관청건축물로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건물은 일제가 1925년 경남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 오면서 지어 부산을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하는 데 쓰여졌다. 한국전쟁 때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쓰였고 1983년 7월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경남도청으로 사용됐다. 이후 부산지방법원 및 부산지방검찰청 본관으로 사용되다가 법조청사가 거제동으로 이전된 후인 2002년 동아대(부민캠퍼스)에 매각됐다.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은 "아픈 역사의 나이테가 새겨진 근대건축물은 우리가 새로운 역사를 다시 만드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다. 전문가 집단, 관심있는 시민들이 근대건축물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보존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훈기자

※게재일 : 2007-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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