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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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시명산...전설 서린 척판암 돌아 박치골 비경까지
2025.05.23
시명산에서 동해로 뻗어간 산허리가 온통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었고 억새는 서로 몸을 비비며 가는 가을을 아쉽다고 울어댄다.
고로쇠나무나 단풍, 당단풍이 아니어도 가을 나무의 단풍은 아름답다. 떡갈나무와 상수리, 신갈, 졸참, 갈참, 굴참나무의 잎도 제각각 짙은 가을 색을 연출한다. 이들도 어엿한 가을의 주인공이다. 결코 짝퉁이 아니다. 기장 시명산(675.6m)에 오르는 길에 짙은 가을을 보았다. 전날까지 내린 비로 대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단풍이 더욱 선명했다. 온 국토가 말라가던 이 가을 제 모습을 가진 단풍을 못 볼 줄 알았는데 하산길에는 숨은 단풍나무 숲을 지났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며 가는 계절을 아쉬워했다.
■ 척판암에서 목을 축이다
들머리인 장안사 주차장에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휴일이라지만 한산했다. 비가 내린 뒤는 한층 더 추워지는 법인데 오히려 날씨가 푸근했다. 패딩을 벗었다. 산행은 장안사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시명산~삼각산을 잇는 종주 산행은 '산&산' 60회에서 소개한 바 있다. 이번 코스는 대부분 당시와 비슷하지만, 척판암과 최근 불광산 근린공원으로 조성되고 있는 박치골의 비경을 소개한다는 의미가 크다.
나무들도 잎들도 제각각 짙은 가을색
원효대사 전설 척판암에선 신라의 당당함이
곳곳 철쭉나무 철모르는 꽃봉오리 피우지만
양산 덕계나 박치골 하산 길은 깊은 겨울
수북한 낙엽 융단 스키 타듯 걸어야 안 다쳐
장안사 주차장~257봉~척판암~불광산~대운산 갈림길~시명산~산불감시 카메라~양산 갈림길~조망 바위~석은덤 갈림길~계곡 하산로(질매재)~대밭~박치골~산책로~장안사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11㎞가 넘는 구간을 휴식 시간을 포함해서 5시간 50분 정도 걸었다.
산꾼들의 속성이란 유독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 길이 결코 안락할지라도 말이다. 주차장에서 산불초소가 있는 희미한 산길을 바로 치고 올랐다. 백련암으로 가는 포장로를 따라가면 편한 길이 보장된다는 것을 알고도 그랬다.
된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장안사를 보기 위함이었다. 아쉽게도 키가 큰 나무에 가려 경내는 온전히 보이지 않았다. 257봉을 지나니 백련암 쪽 도로에서 올라오는 평탄한 길을 만났다. 길은 넓고 편해 보였다.
척판암 앞에서 또 길은 나뉜다. 암자로 들어섰다. 화장실이 입구에서 맞아주었다. 원효대사의 전설이 깃든 암자는 고즈넉했다. 중국의 종남산 태화사 산사태를 예견하여 이곳에서 던진 판자가 1천 명의 목숨을 구했다. 중국 승려들은 신라로 와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 하나만 보아도 신라의 당당함이 느껴진다. 척판암의 약수는 맑고 달았다.
■ 불광산 지나 시명산
도무지 길이 없을 것 같아 돌아서 나가야 하나 걱정하다가 전준배 산행대장이 길을 물었다. 척판암 공양간 부엌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길은 절 앞으로 나 있습니다."
나무 덱으로 만든 다리가 극락교다. 극락교를 건너니 백련암에서 이어진 임도와 만난다. 여기서 또 산길로 접어든다. 두어 번의 오르막을 가팔지게 오르니 불광산(660m)이다. 기장쪽에서 보면 불광산이 기장의 산이다. 비록 시명산보다는 조금 낮지만, 불광산은 장안사를 안고 있는 산이다. 그래서인지 기장군이 조성하는 장안사 박치골의 공원 이름을 불광산 근린공원으로 한 모양이다.
몇 걸음 더 옮기니 대운산으로 가는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울주의 진산답게 그 모양새가 늠름하다. 걸음을 재촉하여 시명산으로 향한다.
곳곳에 철쭉나무가 있다. 꽃봉오리를 솜털로 감싸고 내년 봄을 벌써 준비하고 있다. 참 부지런한 철쭉이다.
시명산은 삼각점이 먼저 보였다. 그런데 비바람에 깎인 것인지 기초 뼈대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이거 산 높이를 30㎝ 정도 낮추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혼잣말을 했더니 먼저 와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던 등산객이 "그 위는 아직 높잖습니까" 하고 점잖게 일러준다.
진달래가 한 무더기 있는 그곳은 아직 흙이 깎이지 않았다. 긴 의자가 있는 공간엔 오랜 세월을 지켰을 소나무가 한 그루 말라 있었다. 제법 나무가 굵었는데 고사목이 된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 등산객이 또 말한다. "2년 전까지는 살아있었어요." 이 분은 시명산을 참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다.
■ 만산홍엽이 여기 있구나
산불감시 카메라를 지나 해운대CC 쪽으로 간다. 군데군데 양산 덕계 방면이나 박치골로 하산하는 길이 있다. 능선을 고집하면 문제가 없다. 이곳 능선에는 이미 겨울이 왔다. 낙엽에 발이 묻힐 정도다. 전준배 산행대장이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스키를 타듯이 걷는 것이 좋다고 한다. 낙엽 속에 돌부리나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의 조망이 썩 좋지 않아 걱정했다. 올라오는 산꾼들에게 물어보니 조망이 좋은 곳이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562봉을 오를 때 또 땀 한줄기를 흘렸다. 봉우리 아래 조망이 탁 트인 곳이 있어 한참을 쉬었다. 멀리 동해와 고리, 일광, 해운대 장산, 황령산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골프장 때문에 능선을 우회하는 8푼 능선 등산로는 깎인 골프장을 보며 걷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시명산으로 올랐던 산줄기에는 아직 단풍이 한창이었다. 556봉을 지나 만난 조망 바위에서는 햇살이 나와 단풍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만산홍엽이다.
함박산 석은덤으로 가는 삼거리는 또 철조망에 막혀 있었다. 삼각산을 보며 능선을 타다가 왼편 박치골로 떨어진다. 물소리가 장관이다. 전날 내린 비가 공을 세웠다. 작은 폭포도 보았다.
박치골로 내려가는 골짜기엔 단풍나무가 지천이었다. "내장산 뺨칠 기세네요." 전준배 산행대장이 기어코 한마디 했다.
계곡을 건너 53번 가로등이 설치된 산책로와 만났다. 가을을 즐기러 온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로 산책로가 빼곡했다. 서두르면 이곳에서 만추를 더 즐길 수 있겠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 그래픽=노인호 기자
※게재일: 2015-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