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사랑하는 <부산일보> 독자를 극장으로 초대하는 ‘BNK부산은행과 함께하는 부일시네마’(이하 부일시네마) 11번째 상영회가 관객들의 호평 속에 마무리됐다.
25일 오후 7시 부산 중구 신창동 ‘모퉁이극장’에 모인 관객 60여 명은 독특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독립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2024년)를 단체 관람했다.
2023년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오로라미디어상을 받은 이 작품은 공상과학(SF) 드라마 형식을 취하지만 사회 비판적 블랙 코미디 성격도 가지고 있다.
지난 13일 공개된 교육부와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작년 초·중·고교생 사교육비가 역대 최대인 29조 2000억 원을 기록했다. 좋은 학원에 아이를 보내기 위한 조기교육 광풍에 ‘4세 고시’ ‘7세 고시’라는 말이 등장했을 정도다.
영화의 주인공인 초등생 동춘(박나은)도 이 광풍의 피해자다. 동춘은 무한한 상상력을 가진 순수한 꼬마지만, 부모 세대는 동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 어린 나이에 사교육 현장에 던져진 동춘은 국영수는 물론 각종 예체능 과목과 제2 외국어 등등 ‘왜 배워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과목들을 공부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학원에서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동춘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막걸리가 대화할 수 있게 되고, 기묘한 일들이 벌어진다.

영화는 초반 전개는 살짝 루즈한 편이다. 동춘이 어떤 캐릭터인지, 왜 페르시아어를 배우게 되는지, 어떻게 막걸리를 만나게 되는지 등 여러 설정을 알려주는 단계다. 그러나 막걸리가 ‘말을 걸기’ 시작하면서 극은 본격 SF 장르로 변한다. 막걸리는 페리시아어를 모스 부호로 변환해 동춘에게 신호를 보내는데, 사교육으로 온갖 잡다한 지식을 갖춘 동춘은 이를 바로 알아채고 막걸리와 대화한다.
막걸리의 지시에 따르면서 수동적이고 소심하던 동춘은 점점 주체적으로 변한다. 자신의 발목을 잡던 약점도 극복하고, 소소한 일탈도 서슴지 않는다. 막걸리가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걸리에게 위기가 닥치고, 동춘은 자신도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작은 모험을 떠난다.
영화엔 전반적으로 사교육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깔려 있고, 유명한 동화가 떠오르게 하는 마지막 장면에선 큰 경종을 울린다. 일부 캐릭터 활용과 개연성 등 아쉬움이 남는 대목도 있지만, 기발한 아이디어와 독특한 전개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넷플릭스 시리즈 <살인자ㅇ난감>의 각본을 쓴 김다민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김 감독은 두 작품의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현장에서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작업을 하고, 집에서는 <살인자ㅇ난감> 각본을 썼다고 한다.

이날 영화 상영 이후엔 관객끼리 감상을 공유하는 시간인 ‘커뮤니티 시네마’가 진행됐다. 모더레이터로 초청된 경성대 글로컬문화학부 문화기획전공 김주현 교수가 자연스러운 소통을 유도하자 관객들은 용기를 내 각자 소감을 밝혔다.
관객층은 다양했다. 30대, 사회초년생, 대학생, 의사 등 젊은 세대들이 눈에 띄었다.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동춘의 또래로 보이는 어린이 관객이었다. 소녀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다음 장면에) 뭐가 나올지 무서웠다”는 의외의 소감을 밝혔다. 아이의 어머니는 “딸이 마지막 장면을 보고 울더라”며 “슬픈 결말이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이어 많은 관객이 자신이 영화를 보며 인상 깊었던 부분과 궁금했던 점 등을 이야기했다.
경남 양산시에서 온 50대 작곡가 관객은 “동춘이라는 아이는 내 어린 시절과 너무 닮았다. 멍하게 앉아 있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데, 그게 멍청해 보이고 굼떠 보인다. 그러다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하는데, 그게 내 어린 시절과 닮아서 소름 돋았다”고 말했다. 이어 “동춘이 어른의 세계를 상징할 수 있는 막걸리를 통해 껍질을 깨고 나아가는 게 너무나 재미있었다”고 덧붙였다.
모더레이터인 김 교수와 관객들의 ‘케미’도 돋보였다. 몇몇 대학생이 “어렸을 때부터 외국어 교육을 받아 유창하게 구사하는 동춘이 부럽다”는 취지의 소감을 밝히자 김 교수는 이를 겨냥해 “사교육의 폐해”라고 지적해 웃음을 자아냈다. 한 관객은 영화 속 특정 장면을 보고 생긴 궁금증에 대해 언급하며 김 교수에게 ‘자신의 해석이 맞느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이에 김 교수는 각자의 해석이 정답이라면서 질문을 던진 관객의 해석 역시 정확하다고 화답했다.
영화가 자극제가 됐다는 관객도 많았다. 한 30대 직장인은 “영화를 보고 나니 도입부에서 동춘이 ‘선생님 이거 제가 왜 해야 하나요’라고 물은 것이 다시 생각났다. 내가 하는 일, 매일의 모든 활동에 대해 ‘왜 해야 하는가’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고 말했다.
동춘이 막걸리의 말을 따르는 것은 사실 자신의 마음 속 목소리를 따르는 것이라는 해석도 인상적이었다. 이 관객은 “‘막걸리가 알려줄 거야’가 ‘마음 속의 목소리가 알려줄 거야’로 해석됐다”면서 “모두가 자신만의 막걸리를 찾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객은 “말을 거는 막걸리를 보고 영화 ‘인사이드 아웃’ 속 캐릭터 ‘빙봉’이 떠올랐다”며 “모두가 어린 시절에 빙봉이나 막걸리 같은 존재를 마음 속에 품고 살았을 텐데, 나이가 들면서 그걸 잊고 살아간다. 마음 속 막걸리나 빙봉을 잘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관객들의 소감을 모두 들은 김 교수는 “생각지도 못했던 지점들도 말씀을 많이 주셔서 감사하다”며 자신의 이야기도 꺼냈다. 그는 “유치원에 들어가는 아들이 있다. 요새 아들은 매일 ‘별은 왜 있어요’ ‘해가 지면 왜 하늘이 보라색으로 변해요’와 같은 질문들을 한다”고 전했다.
이어 “그런 질문이 아주 중요하다 생각한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도대체 어떤 세상인지 이해를 하는 것”이라며 “초등학교만 올라가더라도 이런 순수하지만 근원적인 질문들이 점점 잊혀져 가는 듯하다. 그때는 ‘내가 이걸 왜 하는 거야’로 바뀌게 된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야’가 아니라 ‘내가 이걸 왜 하는 거야’로 변한다. 행위적 질문을 하다보니 부모도 선생도 답을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그러면서 “저도 제가 살아가면서 가슴에 품고 있는 큰 질문이 있다.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세상을 구성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나는 어떤 인간인가’ 끊임없이 질문한다. 제 아들도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하는 질문을 계속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싶다”고 부연했다.
이날 김 교수는 인상 깊은 소감을 남긴 관객 5명을 선정해 경품도 지급했다.
부일시네마는 매월 마지막 주 화요일 오후 7시 모퉁이극장에서 열린다. 부산닷컴(busan.com) 문화 이벤트 공간인 ‘해피존플러스’(hzplus.busan.com)를 통해 이벤트 참여를 신청하면 추첨을 통해 영화관람권(1인 2장)을 증정한다. 다음 상영회는 4월 29일.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의 흡입력 강한 중세 판타지 영화 ‘그린 나이트’(2021)가 상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