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법감정과 일반 상식에 맞지 않는 판결이 나왔을 때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법원이 중범죄자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는 소식을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AI 판사’ 도입은 실제로 가능할까요? 감정이나 피고의 권력, 사회적 지위 등에 휘둘리지 않는 판사는 오직 법과 증거에 따라 공정하고 중립적인 판결만 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상상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노 머시: 90분’(이하 ‘노 머시’)이 지난 4일 개봉했습니다. 크리스 프랫, 레베카 퍼거슨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출연한 이 영화를 직접 관람해 봤습니다.

‘노 머시’는 극심한 경제난 탓에 범죄자 소굴이 된 202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를 배경으로 합니다. 범죄율이 폭등해 공권력이 마비될 수준이 되자 LA는 인공지능 사법 체계인 ‘머시’(Mercy)를 도입합니다.
머시는 증거 수집과 법리 판단은 물론 공판 과정까지 담당하는 AI입니다. 수사기관이 특정 혐의를 받는 피고를 증거와 함께 재판에 넘기면, AI 판사 ‘매독스’(레베카 퍼거슨)는 몇 시간만에 판결을 내립니다.
머시의 도입을 주도한 것은 경찰입니다. 주인공이자 강력계 형사인 레이븐(크리스 프랫)도 머시의 도입을 적극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레이븐은 사형 집행 의자에 앉은 채 깨어납니다. 앞으로 90분 안에 아내를 살해한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대로 사형이 집행됩니다.
현실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설정의 ‘노 머시: 90분’은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리얼타임 스릴러물입니다. 영화에서 레이븐이 마주하고 있는 화면 상단에는 남은 재판 시간이 표시되는데, 이 ‘스크린 타임’이 현실과 거의 동일합니다. 영화에서 5분이 흘렀으면, 현실에서도 5분이 흐릅니다. 이런 연출 덕에 관객은 극 중 인물의 심리와 스토리에 좀 더 쉽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핵심 연출법인 ‘스크린라이프’ 기법도 몰입을 돕습니다. 스크린라이프는 PC 모니터, 스마트폰 화면 등 다양한 디지털 기기의 스크린을 통해 영화의 스토리를 전개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영화 ‘서치’(2018)가 대표적인데, ‘노 머시’를 연출한 티무르 베크맘베토브가 바로 ‘서치’의 제작자입니다.
극 중 레이븐은 아내와 마지막으로 대면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면 AI 클라우드 서버에 등록되어 있는 각종 자료들을 찾아 증거로 제시해야 합니다. 주요 증인이나 참고인과 영상 통화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설정 덕에 극장 스크린에는 휴대전화로 촬영한 세로 영상, SNS 게시물, CCTV 녹화 영상, 실시간 드론 촬영 영상 등 또 다른 스크린 화면이 펼쳐집니다. 시공간적 제약을 벗어나 다양한 화면을 빠르게 볼 수 있으니 일반적인 스릴러물이나 법정 영화보다 훨씬 속도감 있는 전개가 가능합니다.
특히 영화엔 경찰의 가슴 쪽에 부착된 ‘보디캠’ 화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손에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핸드헬드 기법과 같은 역동감이 있어 더욱 현실적인 느낌이 듭니다.
‘서치’ 특유의 또 다른 재미는 증거들을 추적해나가며 차차 실마리가 풀리는 과정이 유발하는 몰입감과 긴장감이었습니다. ‘노 머시’ 역시 레이븐이 증거를 찾아 나가면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 때마다 은근한 쾌감을 안겨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합니다.

영화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를 떠올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미래의 첨단 범죄 대응 시스템 탓에 돌연 범죄자가 되어버린 현직 경찰이 자신의 사건을 파헤친다는 설정 자체가 상당히 유사합니다. 또 ‘노 머시’에서 경찰이 드론을 타고 날아다니며 용의자를 추격하는 장면도 ‘마이너리티 리포트’ 속 경찰들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믿고 보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노 머시’에서 주연 배우들은 대체로 정적인 상태에서 쉽지 않은 연기를 펼쳐야 했습니다. 크리스 프랫은 의자에 앉아 있는 채 연기해야 하는 장면이 많았고, 레베카 퍼거슨은 ‘아이 로봇’(2004) 속 AI인 ‘비키’처럼 스크린 속에만 존재하는 무표정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습니다. 두 주연 배우 모두 어색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연기를 선보여 관객 입장에선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노 머시’는 익숙하지만 보장된 맛으로 관객을 끌고 가다가, 후반부에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갑니다. 영화 ‘원티드’(2008) 감독다운 액션 연출이 제법 실감납니다.

결말부의 스토리는 상당히 극적이라 긴장감을 한층 더 끌어올리긴 하지만, 그만큼 개연성이 좀 떨어집니다. 해결 과정이 너무 순탄하고, 지나치게 긴박하게 흘러간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노 머시’는 설정과 시나리오 등 여러 부면에서 현실성과 개연성이 다소 떨어지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빌런 캐릭터의 존재감도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애초 이런 영화는 깊이 생각하면서 보는 게 아닙니다. 별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팝콘무비에서 현실성과 개연성을 너무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황당해서 몰입감을 해칠 정도만 아니면 되는 겁니다.
영화는 나름의 메시지도 전달합니다. 사법 체계를 AI에게 맡겼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오류와 문제점을 짚어보고 한 번쯤 고민해보게 합니다. “판사들 싹 다 AI로” 바꿨다가는 큰일 날 수 있겠습니다.
제 점수는요~: 75/100
